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의 무의식은 대학졸업과 사회진출이라는 단두대 위에 올라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대학생은 부모에 대한 경제적 정신적 의존이 관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러한 관용은 잘 용납되지 못하고, 독립을 한꺼번에 종용받는다는 사실을 환자도 잘 알기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이다.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거식증이다.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을 이유로 삼으면 자연스럽게 휴학을 할 수 있거나 졸업을 더 연기하고, 부모에게서 경제적 의존 역시 비난 받지 않게 된다.

 그럼 꾀병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꾀병과는 다르다. 개개인이 일상생활에서 두렵고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이를 정면돌파할 상황이 못되면 우회적으로 모면하게 된다. 이때 환자의 무의식은 신체화된 반응, 즉 두통을 비롯한 각종 통증은 물론이고, 공황장애, 강박증, 우울증 등의 다양한 정신신체질환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즉, 심리적 위기감이 더 높은 수위에서 조금은 더 낮은 수위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환자에게는 차라리 거식증처럼 몸이 아프며 고통스러운 것이, 졸업을 하고 독립을 종용받으며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저울질을 하며 선택한 결과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처음에는 이같은 진단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 쉽다.

 이러한 무의식적 기제를 환자가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약물치료만으로는 일시적 호전은 보일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치유되긴 어렵다. 환자 자신의 마음이지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영역을 성정분석의 전문가가 조금씩 납득시켜서 스스로 독립해야겠다는 이유를 찾으면서 거식증도 함께 치료된 경우다.